29/03/2024
🖋️ 《패턴 시커》 편집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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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르다’와 ‘틀리다’의 갈림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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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폐인 가족이다. 그가 어딘가 특별하다는 걸 공식적으로 알게 된 이후, 아주 오랫동안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없다. 그의 안부를 물어오는 이들에게 섭섭하기도 했다. 무탈하다, 잘 지내고 있다고 짐짓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곤 했지만 나는 위축됐다. 어떠한 악의도 없이 건넨 말이었다는 걸 안다.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사자가 아님에도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다.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하고 비장애와 정상성을 같은 것으로 보는 데 익숙한 세상을 살아갈 용기로 다가왔다. 단단하게 쓰인 한 권의 과학책이지만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이가 ‘우영우’를 환대하고 보듬었던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바뀌었다. 호오와 우열의 잣대를 부수고 다채로운 삶을 옹호하는 세계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전형을 은밀하게 강요하는 목소리로부터 나를, 그리고 그를 지킬 수 있다. 의연하게 맞설 수 있다. 다르다는 건 틀린 것이 아니라고. 서로 다르다는 점, 누구도 같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존재다. 이 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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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정하지 않은 것도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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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화두였고, 여전히 그렇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시작으로 다정함, 친화력의 강점을 말하는 책이 여러 권 출간되었다. 독자 중에 "나는 다정하지 않아서 못 살아남겠네"라고 넋두리를 하던 분을 꽤 많이 발견했다. 우스갯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사뭇 진지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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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지 않아도, 어떤 이의 마음을 읽는 데 서툴러도 괜찮다고 토닥이는 책을 만났다. 심지어 그 사람들이 인류의 진보를 이끈 두 축 가운데 하나를 대표한다고 찬양한다. 우리는 모두 각기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도록 적응해왔다는 과학의 언어가 위로로 다가오다니. 《수학의 위로》도 그랬지만,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인 과학이 심금을 울리는 경험이 쌓여가니 내가 오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오해를 스스로에게는 마음껏 허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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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와 함께 읽히기를 바랐다. 이 소박한 바람을 책에 고스란히 녹여 넣었다. 제책 방식도, 판형도, 본문 종이도 같다. 쪽수도 비슷해서 책등 두께도 차이가 없다. 참고문헌이 전체 분량의 4분의 1에 달한다는 점까지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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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만 다르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기댈 수 있다.
각자의 다름을 기꺼이 내보여도 된다.
다채로운 삶들이 얽히고설키며 빈틈을 채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남았고,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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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앓다'에서 '있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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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예지 의원과 이석형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장 사이에 이런 질의가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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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각장애가 있을까요? 아니면 시각장애를 앓는 것일까요. 어떤 표현이 맞는다고 보세요?”
“앓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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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에 들어가면 Autism을 '자폐'로만 표기하고 싶었다. 병을 앓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태나 모양. 증(症)의 사전적 의미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이 있다. 장애를 배제했다. 장애인을 배제하는 데 익숙한 세상에 나름대로 저항하겠다는 의지이기도. 물론 일반에게는 자폐증이라는 표현이 익숙하겠지만, 이 책은 신경다양성 관점에서 자폐를 바라본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신경다양성의 세계에는 자연적으로 끝없이 다양한, 수많은 유형의 뇌가 존재한다. 정상과 비정상, 두 가지만이 존재하는 낡고 부정확한 시각과 전혀 다르다". 나는 '앓다'에서 '있다'로 관점을 확장하는 이 세계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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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따로 요청을 하거나 논의를 하지 않았지만 강병철 선생님의 최종 번역 원고에는 내 바람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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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8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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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책임편집 이형준
번역 강병철
디자인 형태와내용사이, 박애영
추천사 정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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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형준 (Nikon D750, AF 85mm F/1.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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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시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