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1/2023
#151호 #7면 #학술면
7면, 기독교신앙과 정치(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교회의 과제: 간략한 해명과 제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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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혹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과제에 관한 질문은 교회의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해 왔다. 한국 교회의 경우 대체로 폭압적인 군사정부의 시기에는 교회가 정치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주도적이었던 반면, 비교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부터는 오히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으로 달라진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더 이상 질문거리 자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하나의 개별 지역교회나 혹은 하나의 교단에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의견을 표방해도 좋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개별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교회 바깥에서 표명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하나의 지역 교회 혹은 전체 교단교회가 정치적 사안에 참여하고자 할 때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가장 우선적 과제인 복음에 대한 증언에 일치하는지, 그리고 그것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 고려가 먼저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동시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가운데에서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하나 됨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한다.
교회가 정치적인 방식으로 참여하고자 할 때 주목해야 하는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이나 교회 전통에 나타나는 낡은 관점을 오늘날의 사회에 일방적으로 적용시키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권세자들에게 복종할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고 있지만, 이것은 고대사회의 신분제도와 로마제국의 폭압적 지배라는 시대적 한계를 전제로 한다. 이를 망각한 채 성경의 일부 구절을 오늘날 정부에 대한 순종의 근거로 삼으려고 한다거나 혹은 거꾸로 저항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200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정치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 교회가 참여하기 위한 방안을 참으로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질서의 특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 먼저 선행되어야만 한다.
기실 정치(politics)란 단지 국가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여러 세력들 간에 이루어지는 투쟁이라는 협소한 의미로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본래 정치란 도시(polis)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공동 삶을 결정하기 위한 의사소통적 활동과 그 결과 이루어진 공동 삶의 질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 사이에 합의된 공동의 정치질서란 바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데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하고 있고, 여러 조문들에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질서로서의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교회가 기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자유민주주의 사이에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는 개념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민중에 의한 지배’(demos+crat)라는 말이 합쳐진 말이다. 형식적으로 보자면 자유민주주의는 민중의 의견을 대표하는 대의정치와 그 실현을 위한 선거, 법률에 의한 통치, 국가권력의 분립 등과 같은 정치제도들을 통해 구현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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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우리는 교회와 자유민주주의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질문하였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바르트의 정치관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바르트가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대해 저항하였다는 사실은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그리고 종전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을 교회의 중요한 과제로 역설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리고 이처럼 교회가 민주주의를 위해 애써야 한다는 바르트의 정치관은 그의 신학사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귀결된 것이기 때문에, 바르트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교회의 참여라는 과제를 검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가 가장 직접적으로 진술된 글로는 『칭의와 법』(1938)과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1946)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지닌 교회는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바르트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기초한 일종의 “정치적인 하나님 섬김”(Gottesdienst), 즉 “정치적인 예배”라고까지 표현하면서, 그 구체적인 실천의 사례들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첫째, 교회는 시민들의 삶 속에서 ‘자유’가 구현되도록 추구해야 한다. 이는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과 사랑의 영을 통해 자유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이고도 세속적인 영역 가운데에서도 자유가 유사한 방식으로 현실화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실천적 과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개별 시민에게 시민 공동체를 통해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으로서의 자유를 긍정”할 수밖에 없다. 단지 시민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시민들 각자가 교육, 예술, 학문, 신앙 등 각각의 다양한 삶의 영역 안에서 스스로 선택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교회는 노력해야 한다.
둘째, ‘평등’ 역시 교회가 추구해야 할 정치적 지향점이다. 이는 교회가 “한 분 주님 아래에서, 하나의 영 안에서 받은 세례에 기초하여 동일한 신앙 가운데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성령의 지배 가운데 있는 교회 안에서 모든 개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평등한 것처럼, 교회는 “모든 시민들의 자유와 책임의 평등, 즉 모든 시민들을 연합시키고 의무지우는 법 앞에서의 평등”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신분과 인종”에 따라 개인을 차별하는 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이를 통해 시민들 간의 평등이 실제로 구현되도록 교회는 노력해야 한다.
셋째,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들이 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연대적 돌봄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교회의 과제이다. 교회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아래를 바라보는’ 데 있다. 자유와 평등은 단지 정치적으로 선언되기만 해서도 안 되고, 투표권의 보장과도 같은 정치적 제도를 통해서 그저 형식적으로 보호받는 데 그쳐서도 안 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경제적으로 연약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보호받도록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때에야 비로소 이들의 자유와 평등이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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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의 주요 가치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하여 수립된 교회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들과 조화될 수 있고, 세속 사회 가운데에서 시민들의 삶 가운데에서 이러한 가치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교회의 과제라고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남은 과제가 있다. 과연 교회는 어떻게 그와 같은 실천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기본적인 틀로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교회의 실천은 대한민국의 모든 구성원들의 합의 가운데 수립된 헌법이념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가 성숙해지는 것을 지향해야 하며, 현실 정치 영역의 어느 특정 정파를 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지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회의 정치적 실천은 정파적 분열로 인해 이미 갈등이 심각한 한국 사회 가운데 평화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가 어느 한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이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자유민주주의가 구체화될 수 있도록 논의할 기회를 제공하는 큰 소통의 장으로서 기능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둘째, 개별 개신교 교단을 아우르는 큰 범위에서 혹은 전체 교단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을 연구하고 그 실현 방안을 법률과 정책적인 면에서 제안하는 초교단적, 초정파적 기구의 마련이 시급하다. 헌법학자, 정치학자, 정치인, 시민단체, 신학자, 목회자, 청년과 소수자 등 다양한 계층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의사소통적 기구를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한 실천적 제안을 제시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결코 허황된 상상이 아니다. 독일의 전체 개신교 교회를 대표하는 독일개신교교회협의회(EKD)에서는 전문가들과의 오랜 연구와 협의 끝에 이미 1985년에 「개신교회와 자유민주주의: 제안과 과제로서의 헌법국가」라는 문서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책임적 실천을 교회의 과제로 제안한 바 있다.
셋째, 교회가 민주주의 발전과 성숙을 위해 기여하고자 한다면 교회 안에서 먼저 민주주의가 구체적으로 경험될 수 있어야 한다. 복음에 의해 개인이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운영이 교회 내 권력으로 간주되는 안수 받은 사람들만을 중심으로 운영되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특정 성별이나 특정 연령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조를 지속시켜서는 안된다. 교회 안에서 먼저 민주주의가 경험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 내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교회의 운영에 참여하여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결정하는 의사결정 구조의 확립이 시급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당회제도를 철폐하고, 장년과 청년, 남성과 여성 등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동수로 참여하는 정치 구조를 마련하는 것을 전향적으로 고민해 볼 만하다.
넷째, 교회가 자유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정치 현실에 참여할 때 교회는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로비단체로서나 혹은 또 다른 권력기관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신 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교회는 세상 위에 군림하려는 정복자로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현실 참여는 결코 신정정치를 복원하는 것을 지향하지 않으며, 성경에 기록된 수천 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윤리를 오늘날 관철하려는 것을 목표로 해서도 안 된다. 교회의 정치 참여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라는 자유민주주의 헌법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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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정치참여는 개별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 보다 훨씬 까다롭고 예민한 문제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려운 과제라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보다는 이 어렵고 까다로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교회가 함께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뜻밖에 더 큰 교회의 일치를, 세상 속에서 빛나는 등불로서의 역할을 새삼스럽게 재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대화가 사라지고 비난만 난무하는 정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서로를 포용하는 다름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다면, 타인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증진하기 위해 애쓰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평등을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서로가 서로의 짐을 지어주는 돌봄과 연대가 가득한 세상을 위해 책임적으로 실천해 나간다면, 어느새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증언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진 1. 이용주 교수님 사진
연세대학교(M.A/Th.M.)
장로회신학대학교(M.Div.)
하이델베르크대학교
튀빙겐대학교(Dr.Theol.)
숭실대학교 인문대학 기독교학과 조직신학 교수
사진 2. 추천도서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새물결플러스, 2016
이 책은 위대한 신학자이자 정치윤리학자로서의 바르트의 삶을 연대순으로 살펴보며 성찰한다. 바르트는 계속해서 하나님 외에 ‘인간적’인 것이 절대화되지 않도록 불편하게 들릴지라도 시대의 양심으로서 정치적 사안에 대해 목청을 높이도록 도전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회 문제와 정치 참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를 돌아볼 수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외부의 매서운 비판에 움츠러드는 대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