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3/2024
🎉 신간 알림: 『예수 왕의 복음』
매튜 W. 베이츠 지음 | 336면 | p 20,000원
❝복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추천!
김관성 | 낮은담 침례교회 담임목사
김다위 | 선한목자교회 담임목사
김영봉 | 와싱톤사귐의교회 담임목사
박대영 | 광주소명교회 책임목사, 「묵상과 설교」 책임편집
정갑신 | 예수향남교회 담임목사
에이미 필러 (Amy Peeler) | 휘튼대학교
패트릭 슈라이너 (Patrick Schreiner) | 미드웨스턴 침례신학교
리사 보웬스 (Lisa Bowens) | 프린스턴 신학교
니제이 굽타 (Nijay Gupta) | 노던 신학교
마이클 F. 버드 (Michael F. Bird) | 리들리 칼리지 
📌 특징
1) 2024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북어워드(Book Award in Popular Theology) 수상작
2) 2024년 「아웃리치 매거진」(Outreach Magazine) 올해의 신학책(RESOURCE OF THE YEAR) 수상작
3) 「사영리」와 같이 기존의 복음 제시에 담긴 왜곡과 불균형을 성경을 토대로 바로 잡아주는 책.
4) 다양한 진영의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한목소리로 추천하는 책.
📚 책 소개
우리가 가진 기존의 복음 이해를 완전히 뒤집는 도발적인 책이다. 주목받는 학자 매튜 W. 베이츠(Matthew W. Bates)는 최신의 연구와 치밀한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두루뭉술한 구원론 속에서 거짓 안전감에 취한 우리를 뒤흔들어 깨운다. 복음을 구원과 동의어로, 혹은 복음을 그저 개인의 죄사함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성경이 전하는 복음의 진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저자의 친절한 설명과 현장감 넘치는 적용을 따라가다보면,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선언에 담긴 복음의 진리를 더욱 생생하게 보게 될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새 복음이 이전과 다르게 보일 것이다.
📖 종이책 구매처
알라딘: https://me2.kr/Bt7md
교보문고: https://me2.kr/6MUgt
갓피플: https://me2.kr/n4qNp
YES24: https://me2.kr/xzZX5
🗣 저자 소개
매튜 W. 베이츠(Matthew W. Bates)
노트르담 대학교(University of Notre Dame)에서 저명한 데이비드 오운(David E. Aune)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1년부터 퀸시 대학교(Quincy University)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2024년 가을에 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가 있는 노던 신학교(Northern Seminary)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다. 지금까지 번역된 책으로는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새물결플러스, 2020)이 있다.
📗 본문 중에서
매튜 노벤슨Matthew Novenson은 그의 저서 『메시아들 가운데 그리스도』Christ Among the Messiahs에서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합니다. 모데인의 마타티아스Mattathias의 아들, 유다Judas라는 전사는 유다 마카비Maccabee라고 불렸는데요, 이때 마카비는 그의 이름이 아니라 “망치[망치질하는 사람]”라는 뜻입니다. 즉, 그를 유다 마카비라고 부른 것은 그의 이름과, 그가 가진 군사적 능력을 기념하기 위한 경칭을 결합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당시 로마 황제를 생각해 봅시다. 그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Octavian였습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주전 27년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고귀하고 존귀하다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추대되었습니다. 이 칭호는 옥타비아누스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오늘날에는 흔히 그를 가리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릴 때, 그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예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셨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나 요셉의 아들 예수(법적), 혹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실제)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칭호들에는 마땅한 존경과 경의가 담겨있지 않습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에게 최고의 왕권을 부여하셨음을 드러냈습니다.
p39-40 (제1장 왕이 먼저다)
천국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기형적인 복음은 “나쁜 소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을 원하시지만, 사람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다른 요구 사항들을 덧붙인다.” 이처럼 왜곡된 복음관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구원과는 관련이 없다. 만일 당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께 순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 과정에 자신의 행위를 개입시킨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조건을 붙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한 것이다. 복음은 온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이 기형적인 복음의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말이지요.
p75 (제2장 유명해진다)
병원에서 도일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너무나 과분한 기회였죠. 그는 예수님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그 기회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는 아내 샌디와 함께 차를 몰고 지역 교회로 향했습니다. 그의 기쁨은 전염성이 강했고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겼습니다. 결국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우리 가족 역시 그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의 가족이 가게 된 교회, 그레이스 커뮤니티 바이블 교회 에서 저는 Grace Community Bible Church 결국 세례를 받게 됩니다. 저는 그 교회 청소년부에 출석하였고, 우리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도 그 은혜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도일도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었고요. (중략) 사실 마비된 상태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도일은 소변을 보기 위해 카테터를 삽입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도일을 도와주고 내용물을 처리하셔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책과는 거리가 먼 활동적인 분이셨는데요. 이렇게 실천적이고 이타적인 방식으로 도일을 섬기는 법을 배운 일은 아버지에게도 은혜의 한 방편이었습니다. 제가 도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바로 그는 우리 주 예수님의 좋은 소식, 복음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고후 4:4 새번역)을 보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그 넘쳐흐르는 영광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도일은 복음의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p98-99 (제2장 유명해진다)
루이스의 명작, 『천국과 지옥의 이혼』(홍성사, 2019 역간)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처럼 진행됩니다. (중략) 루이스의 첫 번째 교훈은 지상에서의 명성과 하나님으로 인한 명성은 별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명성은 인색하고 배타적입니다. 내가 유명한데 타인의 명성이 커지면, 타인의 명성이 나의 명성을 가려서 내 영광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점을 바꾸시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끌어내림으로써 우리 자신의 명성을 쌓으려고 애씁니다. 이 세상의 명성은 마치 각 개인들이 질투심에 휩쌓여 사재기하는 한정 수량의 희귀한 상품과 같습니다. 플랫폼, 팔로워, 영향력에 대한 집착 등 오늘날 “크리스천” 셀럽celebrity 문화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거기에 담긴 세속성과 위험성에 주의해야 합니다.
p109 (제3장 영광의 양면)
속죄의 속량 이론은 논쟁의 여지 없이 성경적인 이론입니다. 하지만 그 한계도 존재합니다. 이 이론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속량의 은유를 받아들인다면 과연 그 속량은 누구에게 지불되는 것일까요? 성부 하나님에게? 아니면 사탄에게? 오리게네스Origen와 같은 일부 초대 교회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값을 치러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바로 마귀였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마귀에게 끌려 갔었다. 그러므로 마귀는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에 대한 값으로 요구했다.” 오리게네스의 생각에 마귀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확실한 화폐를 받기 전까지는 포로들을 풀어주길 거부하는 존재였습니다. 한편, 키프리아누스Cyprian와 같은 교부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마치 미끼를 던진 함정과 같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그 미끼를 물었을 때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귀의 입”에서 겨우 빠져나왔고, 속량은 성부 하나님에게 드려졌다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마귀 즉, 속이는 자를 속였다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사탄에게 값을 치렀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제가 알기로 많은 고대 신학자들, 그리고 거의 모든 현대 신학자들은 마귀에게 속량을 지불한다는 생각에 문제가 많다고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한 분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만이 정당한 주권자이시고, 사탄은 그저 속이며 기만하는 강탈자에 불과한데, 그런 사탄에게 적법하게 속량을 받을 권한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p155-156 (제4장 복음은 회복을 일으킨다)
여러분이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개는 혼자서) 자주 소비하는 이미지 기반 콘텐츠를 떠올려 보세요. TV 프로그램, 영화, 비디오 클립, 메시지, 밈, 이모티콘, 스냅샷과 같은 다양한 미디어를 떠올려 보세요. 또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X(전 트위터), 스냅챗, 텍스트, 유튜브, 틱톡, 아마존, 넷플릭스와 같은 플랫폼을 생각해 보세요. 콘텐츠를 선택해서 보고 난 뒤 후회한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섹스, 탐욕, 폭력의 강렬한 이미지들이 우리 눈 앞에 나타나는 순간 이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새롭게 다시 시작하길 바란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그 기억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한 번 본 강렬한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미칩니다. 대개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말이죠. 화면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이미지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도록, 이보다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느끼도록 훈련시키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분명 우리가 보는 이미지들에 의해 변화되고 있습니다.
p194 (제5장 왕처럼 변화하기)
어째서 오늘날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 되기를 꺼려할까요? 바나 그룹Barna Group이 수 년에 걸쳐 수행한 전문적인 사회학 연구에 따르면, 비기독교인들은 6가지 주요 영역에서 기독교인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 위선적이고,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회심자를 얻는 일에만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반동성애에 앞장서고, 과잉보호되고 있으며, 남을 쉽게 비판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외부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 상상 속의 장애물들이 아닌 진짜 장애물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목록을 다시 읽어보고 깊이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외부인들은 무엇보다도 이 6가지 부정적인 영역이 기독교인이 되고 싶은 마음을 꺾는다고 말합니다.
p247 (제6장 비종교인을 위한 좋은 소식)
바나 그룹은 청년들이 보고한 내용을 종합하여 내부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세 가지 주요 원인을 파악했습니다. 첫째, 새로운 세대의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를 통해서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 모임이 피상적이고 또한 충분히 세대를 뛰어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정보만을 제공할 뿐, 기독교에 수반되는 복잡성, 어려움, 의구심과 씨름하는 데서 오는 지혜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셋째, 교회는 총체적인 소명을 전수하지 못합니다. 교회 생활은 분업화되어 있으며, 딱히 직업과 관련이 없습니다.요약하면, 제자도의 전반적인 실패로 청년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1) 진정한 관계 결여 (2) 의구심과 복잡성에 대처하는 지혜 결여 (3) 총체적인 소명 결여. 일단 제자도라는 큰 문제를 먼저 다루고 그 후에 각각의 문제들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p263 (제6장 비종교인을 위한 좋은소식)
기독교 출판사